▶ 다녀온 곳 : 여주 신륵사
▶ 다녀온 날짜 : 2018년 5월 7일
▶ 함께한 분들 : 가족
▶ 위치 : 경기도 여주시
▶ 내역 :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벽절[甓 寺]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있는 다층전탑(多層塼塔)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인 석등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는 극낙보전(極樂寶殿) 과 그이외의 부속건물로 구룡루(九龍樓) ·명부전(冥府殿)·시왕전(十王殿)·산신당·육각정 등이 있다.[네이버 두산백과 참조]
▼ 여주하면 떠 오르는 대표적인 절이 '신륵사'~~ 주변에 남한강이 흐르고 여주대교 건너편의 부드러운 '봉미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많은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신륵사'~ 고려말 '나옹대사'가 입적하였다는 바로 그 사찰~ 5월첫 연휴 마지막날 찾아 나선다.
▼ 입장료 1인 2,200원을 지불하고, 일주문을 지나서 넓은 마당길을 걸으면 좌우로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이고~ 그 길따라 편안히 걷다보면 '불이문'을 만난다.
▼ 간단하게 '신륵사'를 소개한글~
▼ 불이문 통과하면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누각~~
▼ 보통 사찰들은 산속에 거의 많이 있으나, 이 '신륵사'는 강가에 있다보니 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게 되나보다~
▼ 누각에 오르니 오른쪽으로 남한강 뱃놀이를 하는 유람선이 보인다.
▼ 시원한 우물가 '세심정'에서 약수 한바가지 들이키고~~
▼ 오른쪽 멋진 정자가 있는 곳을 먼저 둘러보기로~
▼ '강월헌'~ 6각형의 정자인데, 1972년 홍수로 떠내려가서 1974년에 다시 지었다라는~
▼ '강월헌'~ '나옹'의 화장지 옆에 세워진 6각의 정자이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이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웠다고 한다.
▼ '나옹'을 기념하기위해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 세워져 있기에, 강을 바라보는 아주 멋진 조망터이다. 건너편이 '조포나루터'~
- '신륵사'는 고려 우왕 2년(1376)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조형물도 모두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것이다.
양주 회암사에 머물던 나옹선사가 왕명을 받고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곳은 밀양땅 형원사(瑩源寺)였는데 얽힌 사연이 기이하다. 나옹선사가 회암사를 중수하고 낙성회를 여는데 비단과 곡식을 가져다 공양하는 여인네들이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몰려들어 생업을 포기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어 산문을 닫아도 막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고, 급기야 나옹선사에게 밀양땅 형원사로 한시 바삐 떠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나옹선사의 그 진한 종교적 매력과 호소력은 다름아닌 중생구제의 원(願)이었겠으나 시대가 그를 수용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옹선사는 이미 병이 깊었던 모양인데 왕명이 떨어졌으니 길을 달려 이곳까지 왔다.
선사는 더 이상은 못 가겠다며 신륵사로 들어갈 것을 재촉하였고, 이곳은 선사의 열반지가 되었다. 그때 하늘에선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용이 호상하는 등 신이한 일이 벌어지면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고 전한다. 스러져가던 신륵사를 대대적인 중창불사로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 석탑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나루터가 조선시대 4대 나루터중의 하나인 '조포 나루터'라고 한다.
▼ '강월헌'에서 바라다보는 남한강의 경치는 정말 일품이다.
▼ '다층전탑'~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올린것이 특징으로, 이 탑을 계기로 '신륵사'를 예전에는 '벽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곳에서 강가를 보면 시원한 강줄기와 건너편의 평야가 조망된다.
▼ '다층전탑'의 기단부는 '화강석'을 사용했고, 탑신부가 모두 벽돌로 밀착되어 있다. 이중기단 위쪽으로 3단의 석단을 얹고 그 위에 탑신을 안치했다.
▼ '대장각 기비'~ 조선의 억불정책 속에서도 지리적인 여건과 뛰어난 풍광덕분에 '신륵사'는 문장가나 묵객들의 발길이 잦았다고 하는데, 이곳에 세워진 '대장각기 비문'은 '이숭인'이 짓고 '권주'가 해서로 썼다고 한다.(보물 제230호)
▼ 국수처럼 휘어진 소나무들~~ 이 길을 따라가면 신륵사 사찰 주변을 한바퀴 돌아볼수 있는 둘게길이다.
▼ 간간히 의자도 보이고~
▼ 하산길 오른쪽으로 '부도'가 보인다.
▼ 길게 이어진 둘게길을 끈어서 '부도'가 있는쪽으로 내려가본다.
▼ '보제존자 석종부도'~
조사당을 뒤로 하고 북쪽의 낮은 언덕으로 오르면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화상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가 있다. 조용한 소나무숲 속에 안치된 부도는 석등이 바로 앞에, 석종비가 뒤에 있는데, 위대한 고승이었다는 평가를 손색없이 나타내고 있다. 고려 말 불교를 중흥하고 조선 초 불교의 초석을 다진 고승으로 2천여 명의 제자를 배출했던 나옹화상의 묘역은 그만큼 정성과 공력을 들여 마련한 흔적이 짙다. 서북쪽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 일대는 명당으로도 알려진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만들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중앙의 '부도'앞에 있는 사진 왼쪽의 '석등'도 보물 제231호로 부도의 주인께 등불공양을 올리는 공양구이다. 또한 '부도' 뒤편(사진의 오른쪽)에 있는 '보제존자 석종비'도 보물 제229호로서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서예가로 이름 높은 '한수'가 썼다고 한다.
▼ '부도'를 지나서 '조사당' 방향으로 내려간다.
▼ '조사당'~~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은 금당 왼편 뒤쪽에 있다. 대들보가 없는 팔작지붕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아담하고 예쁜 건물이다. 정면 앞쪽에는 띠살무늬의 분합문 6짝을 달았으나 벽체로 고정시켰고, 측면 한 짝에 정자문살을 달아 출입문을 삼고 있으며, 3면에는 모두 벽을 둘렀다. 공포는 내외이출목의 다포계 형식을 썼으며, 내부는 우물반자의 통간으로 되어 있다.[네이버 참조]
이 건물은 가운데 기둥을 세우지 않아서 대들보가 없는것이 특색이다.
또한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는 설과, 조선 태조가 스승인 '무학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도 있다고한다.
이곳은 고려말 한 줄기 빛으로 여기었던 도인 세분의 영정(지공/나옹/무학 대사)이 안치되어 있다.
▼ '조사당' 앞에 늘 푸른 향나무~~ 멋진 운치를 자아낸다. 이 향나무는 '무학대사'가 스승인 '나옹화상'을 추모하기위해 심었다고하니, 향나무의 수령이 적어도 600년은 넘었다고 한다.
▼ '명부전'~ 사후세계의 심판관인 '시왕'이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시왕'은 죽은자들에 있어 생전에 지은 죄와 선행을 심판하는 10명의 판관이며 이중 '염라대왕'은 '시왕'중 5번째 판관이다. 사람이 죽게되면 49일안에 다른 세계에서 태어나게 되는데, 이곳 '명부전'은 조상들과 부모들이 '극락왕생'을 하도록 '천도재' 및 기도를 드리는 곳으로, 살아있는 후손들도 부처님께 복을 발원하는 전각이다.
▼ '봉송각'~
▼ 사찰 뒤로 한바퀴 돌아서 거꾸로 맞이하게 되는 '극락보전'의 모습~
▼ 곧 부처님 오신날이기에 많은 연등들이 예쁘게 달려있고, 그 가운데 8층으로 구성된 '다층석탑'이 보인다. 탑신부는 8층으로 구성되었고 석탑에 비룡을 조각해 두었다.
▼ '극락보전'의 모습~ 정남향으로 정조 21년부터 3년에 걸쳐 완공했으나 임진왜란때 불타고 현종21년에 다시 건립했다고 한다.
▼ 경내에 아주 멋진 향나무~~ 수백년은 되었을것같은~~
▼ '봉미산 신륵사'라는 현판과 함께 옛스러운 멋을 풍기는 누각이 앞에 떡 버티고 있다. 이것이 '구룡루'~
▼ '구룡루'를 앞에서 담아본다. 명칭을 찾아보니 '석가모니 부처님' 탄생시 물을 뿌려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아홉마리용에 대한 경전의 내용과, 창건설화에 나타나는 승천한 아홉마리의 용에서 따왔을것이라는 추측만이 남아있고, 기록은 없다고 한다.
▼ 멋진 은행나무 보호수아래에서~~ 무려 수령이 600년이나 되었다는....
▼ 사찰을 둘러보고 나가는 길에 강가쪽으로 휴식처가 있기에 내려가본다.
▼ 온통 민들레 홀씨들로 주변을 가득채운 공간~
▼ 남한강 유람선과 어울어진 한폭의 그림같은 휴식처에서 모처럼 편안한 시간을 가져본다.
▼ 강가를 나서면서~
▼ 불이문을 지나 이제는 퇴소할 차례~~
▼ 은행나무길따라서 편안하게, 그리고 조심스러운듯 차분하게~
▼ 일주문을 나서면서 오늘 '신륵사' 사찰 탐방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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